오늘따라 웬일인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그것도 이슬비. 이 작업실 안에 있으려니 답답하고 지루하다. 
                  이럴 때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날씨는 좋지 않고 붓은 나와의 동행을 거부한다.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전화기마저 잠을 자는지 안타깝다.
                  그렇지만 그 이슬비라는 야릇한 것 속에 담긴 추억의 향수 때문인지 기분이 묘하다.
                  3일 전에 먹다 남은 소줏병이나 벗삼아 마음을 달래야지.


			  
                    처음에는 단체나 각종 모임, 산악회 산행에 동행했었다.  그런 산행을 몇번 하고 나니까 나의 산행목적과는 
                  거리와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체 행동에서 오는 주위 여건이 나 혼자만의 작품구상이나 스케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앞사람의 뒤꿈치만 쳐다보고 걸어야 하는 행위는 명상과 참선 그리고 이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여유가 필요한 나에겐
                  의미가 없었다
                  관광버스를 이용한 산행후의 귀가길은 술과 노래, 차안의 자욱한 담배연기로 피로가 극심해 오히려 건강을 잃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산행은 자연오염의 주원인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나 역시 지금은 자연보호 및 오물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산에 가면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그렇게 말한다.
                  나는 할말이 없다.
                  다만,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만이 이 물음에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1970년 후반전까지만해도 나의 동양화작품은 전통산수화가 가지는 기교적 손놀림과 붓의 제스처가 만들어낸
                  직접적, 객관적, 설명적, 감상적 느낌 그대로 또는 자연그대로의 리얼리즘 표현방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80년 초기부터는 잦은 산행의 영향으로 산의 형상을 나의 내면의 심상에 믹스시켜 
                  3차원적 산의 조형구성에 시각의 촛점을 두었다. 산이 갖는 모양과 느낌에 따라 산의 웅장함과 
                  겸허함 속에 회화의 논리를 흡수시켜 영상적으로 산울림 소리를 수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나의 시리즈작품, '산울림'이다.

                  자주 산행을 하다보니까 산이 높고 낮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지금 산에 있다는, 
                  산 그자체에서 느끼는 실체적 뉘앙스가 중요하다.

                  감상형적의 리얼리즘은 마음속에 내제된 감성과 이성의 제한을 받기때문에, 이를 과감하게 해체시키며 
                  이루어지는 나의 작업같은 것은 산에서 스케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새로운 산울림의 형상을 잉태하기 위한 몸짓이다. 또 조형성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형식논리를 
                  대입한 까닭에 사실주의 차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산의 이미지를 비재현적인 형상언어와 접목, 
                  일반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산의 소리를, 해탈의 실체에 내재된 형상을 표현하려 한다.

                  많은 산행 속에서 구상한 스케치의 언어들은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창작의 고통이
                  이렇게 어려운 줄 또다시 생각하게한다. 화실 안의 좁은 공간속에서가 아닌 대자연의 무궁한 심상에서
                  묻어온 것이지만 그 속에서의 마음에 드는 작품 한 점이 창작되기까지는 너무나도 고통이 따른다.

                  이렇게 나의 작품세게에 담긴 산울림의 이미지는 산 그자체가 보여주는 거대한 변화와 조화 그리고
                  리듬 속에서 선과 색에 이어 새로운 면의 조형으로 바뀌어진다. 선은 겹겹으로 쌓인 능선의 강약에 
                  의한 다양한 선이요 색은 계절과 음양에서 오는 시간이 주는 화려한 물감이다.
                  그리고 면은 높고 낮음과 연결된 산의 각도다.

               이 속에는 구름과 새소리,물소리, 종소리, 바람소리, 하늘에 있는 초승달 등이 샤머니즘적 색채의 언어와
               결합하고 작가의 독특한 이성적 감수성으로 흡수되어 반추상적으로 표현되어진다.
               그것은 산이 주는 실상의 느낌에 인간내면의 실체, 즉 참선과 수도, 그리고 정신적 지주를 해체시켜사각의
               화면 속에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바꾸어 표현하면 자신을 둘러싼 여러가지 현실의 많은 기억들, 치열한
               현대문명의 메카딕한 속성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또 기억풀이, 그 속에 번뇌와 해탈을 위한 샤머니즘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몸부림이다.

"1994년 월간지 '사람과산' 9월호 취재진과함께 백운산에서"

요즘 나의 경우에 한달에 대여섯번은 꼭 산행을 한다.